Cafe Enterprise




최근 제임스 커크는 달짝지근한 행복하고도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고 있는 중이다. 24년 인생, ‘케이크라고 하는 것이 이렇게 맛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이제껏 커크는 저주받은 몸뚱이 온갖 해괴한 알레르기란 알레르기는 다 발병되는 몸뚱이 - 탓에 먹는 것도, 만지는 것도 함부로 손대지 못했다. 먹음직스럽게 익은 빨간 딸기가 올려져 있던 초콜릿 케이크가 고동빛 광채를 뿜어대며 얼른 자신을 먹어달라고 유혹하는 것을 참지 못하여 한 입 먹었다가 바로 응급실에 실려 가는 참사가 벌어지기도 했으니 말이다. 온갖 검사는 다 해보았지만 그래서 결국 생크림이 문제인지, 밀가루가 문제인지 아니면 기타의 것이 문제인지는 밝혀내지 못했다.


그렇게 좋냐?”

당연하지!”


그러던 최근, 커크는 이제 남부럽지 않을 만큼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꼬마아이처럼 입가에 생크림을 덕지덕지 묻혀가면서 케이크를 흡입하는 꼴이란……. 그나마 네가 얼굴이 제임스 커크니까 아주 못 볼 정도는 아니라고 본즈가 한 마디 덧붙였다.


칠칠맞게. 뭐하는 거야? 얼굴에 다 묻히고.”

너무 맛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지적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얼굴로 술루는 가볍게 커크의 얼굴에 묻은 생크림을 닦아주었다. 마침 가게를 방문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해 진열대로 간 술루를 보며 커크는 눈을 반짝였다.


그래서 어떻게 생각해? 별로야?”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그냥 네가 하고 싶으면 하는 거지.”

잘 할 수 있을까.”

자신감 빼면 시체인 네가 뭘 걱정 하냐. 뭐든 좋아할 거야. 사귄지 1년 된 기념으로 이벤트 해주려고 하는 건데 술루가 그런 걸 대놓고 싫어할 만한 성격도 아니잖아. 네 실력이 엉망진창이어도 나쁜 말은 안 할 거다.”

위로하는 척 하면서 병이란 병은 다 주는 나쁜 의사선생.”

꺼져.”


커크는 접시에 남겨져있던 케이크를 한 입에 우겨넣고는 부랴부랴 가게를 나섰다. 술루가 퇴근하기까지 시간은 남아있었지만 앞으로 커크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으므로.

 


 


작년, 제임스 커크는 히카루 술루와 연인사이가 되었다. 케이크를 먹지 못하는 청년과 케이크를 만드는 게 일인 청년의 조합은 퍽 웃긴 조합이었다. 커크의 입장에서는 나름 필사적인 술루의 입장에서는 상당히 괘씸한 노력 끝에 두 사람은 연인이 되었고, 커크는 케이크를 먹을 수 있게 되었다. 술루가 만들어준 케이크를 양 손 가득 포장해가서 집에 온갖 자랑이란 자랑은 다 하고는 가족끼리 나누어먹었다는 건 술루에게 비밀이다.

벌써 1년이라는 시간이 지났다는 게 실감이 나지 않으면서도 며칠 전부터 계속 술루에게 무엇을 해주는 게 좋을지 머리 빠지도록 고민한 커크가 내린 결론은 바로 술루에게 케이크를 만들어주자, 라는 것이다.

케이크를 전문적으로 만드는 사람에게 살면서 단 한 번도 케이크를 만들어본 적이 없는 사람이 만들어 주는 케이크가 얼마나 볼품없고 모양 빠지는지는 잘 알고 있지만 그래도 커크는 꼭 그러고 싶었다. 무엇보다 술루는 케이크를 만드는 것을 정말 좋아했다. 가게에서 케이크를 만들 때나 커크에게 케이크 혹은 그에 비슷한 것들을 먹게 해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모른다. 본즈에게 일일이 커크의 알레르기 반응을 묻고, 설탕을 많이 넣지 않으면서도 디저트 본연의 단 맛을 내기 위해 연구에 연구를 계속한다. 이 한 몸 불사르는 한이 있어도 오늘 케이크는 반드시 완성을 하고 말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커크는 술루의 집으로 향했다. 어지간한 도구는 그 집 주방에 다 있다. 문제는 커크가 사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너무 난이도를 높게 잡으면 될 일도 안 되는 법이다. 가장 무난하고 쉬운 생크림 케이크를 만들기로 한 커크는 소매를 걷어 올리며 각오를 다졌다.

 


 


커크는요?”

할 일 있다고 아까 먼저 갔어. 너도 어서 가봐. 오늘이잖아?”

저 지금 창피해져서 얼굴 빨개졌죠.”

아니, 전혀.”


으이그, 못 살아. 술루는 부랴부랴 가방을 챙기고 집으로 향했다. 물론 두 사람이 연인 사이가 되고 지금까지 관계를 유지할 수 있는 것에는 본즈의 매우 지대한 도움이 있었다지만 아무리 그래도 다른 사람의 입에서 1주년 기념일 이야기를 들으니 얼굴이 화끈해졌다. 원래는 오늘 휴가를 받아 둘이서 분위기 좋은 곳으로 놀러갈까, 생각하고 있던 술루에게 집에서 보자고 한 건 다름 아닌 커크였다. 집에서 보자! 하고 말하던 그 얼굴이 어찌나 반짝거리던지. 커크는 죽었다 깨어나도 모를 것이다. 그가 자신을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할 때의 얼굴이 얼마나 반짝거리며 딱 티가 나는지. 나는 지금 무언가를 준비하고 있소, 그러니 기대하시오! 그 얼굴을 애써 모른 척 해주는 것도 일이다.

둘이서 마시기 적당한 와인과 간단히 먹을 안주들을 손에 들고 부랴부랴 집으로 향하던 술루는 점점 집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흔히 주방에서나 맡을 수 있던 그 냄새다. 술루는 서둘러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마자 얼굴로 쏟아지는 매캐한 냄새에 기침을 터트렸다.


이게, 콜록, 콜록!”

, 술루…….”

커크! 뭐하는 거야?”

그게…….”


엉망이 되어버린 주방 바닥과 벽, 매캐한 냄새, 새카맣게 탄 무언가. 술루는 금방 상황을 파악하고는 서둘러 집에 달린 문이란 문은 싹 열어젖혔다.


바보도 아니고, 연기가 났으면 문을 열어야지! 큰일 났으면 어쩌려고 그래?!”

……신고 들어올까 봐.”

……내가 이 세상에서 들은 말 중에 제일 멍청한 말이네. 연기를 너무 마셨어? 머리 아파?”


한바탕 큰 소란이 좀 가시자 술루는 이제야 똑바로 커크와 집안을 둘러볼 수 있었다. 엉망이 된 주방은 그렇다 치고, 술루는 서둘러 냉동실에서 얼음 팩을 꺼내 수건으로 감싸고는 커크의 손에 대주었다. 심하지는 않지만 발갛게 부어오른 곳이 군데군데 있었고 여기저기 까지고 물집이 잡힌 걸 보니 영 안타까웠다. 태어나서 오늘 처음으로 잡아본 기구들일 텐데 손에 익숙하지 않으니 이렇게 다치지.


많이 안 아파?”

, 잘 모르겠어.”

머리도 좋은 애가 왜 바보같이 이러고 있었어. 속상하게.”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 거리고 있는 커크를 식탁 그나마 좀 멀쩡해 뵈는 의자에 앉힌 술루는 그대로 꼼짝 말고 얼음찜질을 계속하라는 지시와 함께 엉망이 된 주방을 치우기 시작했다. 그 모습을 보고 일어나 같이 치우려고 하는 커크를 다시 자리에 앉힌 술루는 매우 능숙한 손길로 순식간에 주방을 싹 치우고는 새로 케이크를 만들 준비를 했다.


내가 치우는 속도가 빠른 게 왜겠어? 하도 많이 어지럽혀서 이젠 치우는데 골이 난 거지. 됐어, 이제 이리와.”


술루는 천천히 커크가 보고 익히는 속도에 맞추어 케이크를 만들기 시작했다. 빠르게 완성되어가는 반죽과 반죽을 덮는 새하얀 생크림, 마지막으로 그 위에 딸기를 올리는 순간까지. 커크는 그 모든 게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새하얀 생크림 케이크 위에 올려진 먹음직스러운 딸기. 완성된 쇼트케이크를 보며 커크는 케이크와 술루를 번갈아보더니 침울한 얼굴이 되어서는 말했다.


미안해, 잘하고 싶었는데.”

기특하니까 봐줄게.”


케이크를 조각내어 접시에 덜은 술루는 무언가 생각이 났다는 듯, 탄성을 내뱉었다.


?”

나 먹고 싶은 거 있어.”

뭔데? 말만 해. 가서 사올게.”

이리 와봐.”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술루의 쪽으로 몸을 기울인 커크는 곧 손가락으로 생크림을 덜어 자신의 입술에 묻히는 술루를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잘 먹겠습니다.”

, 술루, 잠깐, 이런 건 어디서 배운, 으악!”


, 소리가 날 정도로 감칠맛 나는 입맞춤에 아쉬워할 틈도 없이 입가를 혀로 핥는 술루를 보며 커크는 결국 백기를 들었다.


맛있게 드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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쩜오온 D16a <바다 속 새> Walking Maze Tre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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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저한테 데리고 오셨다는 말 인거죠?”

미안, 정말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어.”


곰방대에서 피어오른 옅은 회색빛 연기가 허공에 녹아든다. 맥코이는 자기도 모르게 그 연기를 따라 시선을 움직인다는 것을 깨닫고 다시금 술루에게로 시선을 고정시킨다. 그러거나 말거나, 연기는 곧 뱀이 되었다가 용이 되었다가 제멋대로 모습을 바꾸며 너울너울 춤을 춘다. 결국 맥코이는 허공을 향해 고갯짓을 했고, 가볍게 숨을 뱉어내는 술루에 의해 연기가 순식간에 흩여져갔다.


스팍은요?”

성에 남는데.”

……알만 하네요. 그 분이라면 그런 선택을 하실 줄 알았어요. 현명하시네요.”

이렇게 부탁할게, 술루. 앞으로 딱 3. 저 녀석이 열아홉이 될 때까지 무사히 지켜줘.”


맥코이의 말에 아주 약간, 술루의 미간이 찌푸려진다. 맥코이가 이렇게까지 하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는 것을 물론 알고는 있었지만 쉽게 바로 승낙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언뜻 태평하게까지 보이는 그의 자는 얼굴을 보니 더욱 그렇다.


잘못하면 제가 죽는 건 아시죠?”

……그래, 알아 하지만 이 일을 맡길 사람이 너 밖에 없다는 것도 알아. 내 얼굴 봐서라도 부탁할게.”

그렇게 말씀하시면 정말 거절 못하는데.”


술루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막상 승낙을 받아냈음에도 불구하고 맥코이의 얼굴은 쉬이 풀어지지 않았다. 그런 맥코이를 보며 술루는 더욱 입 꼬리를 당겨본다.


걱정 마세요. 제가 지킬게요.”

너보다는 저 녀석이 걱정이지. 한 성격하는 꼬맹이거든.”

저만 하겠어요?”

그건 그래.”


쉬이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는 모양인지 걱정스러워 보이는 맥코이를 잘 달래 돌려보낸 후에야 술루는 깊은 한숨을 내쉰다. 맥코이에게 했던 말은 결코 가벼운 말이 아니었다.


‘3년이라…….’


이제까지 살아온 세월에 비하면 턱없이 짧은 세월임은 분명했지만 그와 함께 생활하게 된다면 분명 제일 길고 고된 시간이 될 것은 분명했다. 술루는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고른 숨을 내쉬며 곤히 자고 있는 소년은 아직 어린 티가 났다. 술루는 앞으로 소년에게 닥쳐올 일들을 생각하자 그가 조금은 안쓰러웠다. 손가락 사이사이로 흩어지는 부드러운 금빛 머리카락에 희미하게 미소를 짓고 있자니 소년이 몸을 뒤척인다. 곧 감겨있던 눈이 부드럽게 열리며 눈꺼풀 아래에 감추어두고 있던 보석을 드러냈다. 술루는 자기도 모르게 그 눈을 빤히 바라본다. 저런, 완전히 저주를 받을 운명이었잖아. 술루는 통탄함을 애써 감추며 이제 막 눈을 뜬 소년을 보며 미소 지었다.


곤히 주무시던걸요. 혹시 잠자리가 불편해서 금방 깰 줄 알았더니.”

, 누구야?”

앞으로 당신이랑 3년을 같이 살 사람인데, 혹시 맥코이에게 아무것도 못 들으셨어요?”

맥코이? 본즈 말하는 거야?”

푸하, ‘본즈.”


그 사람에게 말 뼈다귀 같은 별명을 붙일 수 있다니 역시 왕의 핏줄은 다르네, 따위의 말을 중얼거리며 술루는 여전히 자신을 경계심 가득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소년을 보며 말했다.


저주 받으셨다면서요, 꼬마 도련님.”

너 정체가 뭐야.”

레너드 맥코이와 스팍이 당신을 맡길 정도로 신뢰하는 사람?”

…….”

동시에 당신에게 저주를 내린 사람들과 같은 부류의 사람.”

……!”

설마하니 이 자리에서 저를 사형시킬 생각은 아니시겠지요, 왕자님. 아니, 그보다 그럴 수 있기나 하면 말이지만.”


순식간에 가라앉는 영롱한 푸른 눈을 보며 술루는 진심으로 박수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한 성격하는 꼬맹이거든.’ 뒤늦게 본즈의 말이 귓가에 아른거린다. 금방이라도 덤벼들 것 같았던 술루의 예상과 다르게 소년은 차분에게 다시 눈을 깜빡이며 술루를 똑바로 바라본다. 술루는 의외라는 듯 턱을 괴고는 소년의 시선을 맞받아쳤다.


네가 정말로 내 저주를 풀어줄 수 있다면.”

있다면?”

그 땐 내가 널 살려줄게.”

꼬마 도련님 당신이?”

내 이름은 제임스 타이베리우스 커크! 장차 이 나라의 왕이 될 사람이야! 꼬마라고 부르지 마!”

좋아요, 커크.”

너도 해야 할 게 있을 텐데?”


도전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그 눈을, 술루는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바라본다.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리지는 않네. 현명하고. 잘생기기도 했고. 술루는 키득거리며 말했다.


히카루 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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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정함. 히카루 술루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그 어떤 감정보다 다정함이라는 감정이 제일 무서운 것중에 하나라는 것을 안다. 한 없이 따스한 감정의 이름이었으나 그 다정함으로 인해 겪을 수 있는 아픔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무겁고 아프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따뜻하게 옆에 있어주던 것을 잃은 지금 뼈저리게 느끼고 있으니까.

따지고 보면 첫사랑이었고, 짝사랑이었다. 12. 해서는 안 되는 두 가지를 동시에 해버리고 말았으니 어련하겠어. 술루는 익숙하게 워프장치를 움직이며 생각했다. 평소와 다름없는 일, 특별할 것 없는 일상. 며칠 전에 봤던 클래식 영화가 무척이나 재밌었다는 체콥과 영화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소소하게 보내는 시간. 술루는 이 모든 시간이 무료하게만 느껴졌다. 그랬기에 더욱 공허함이 안에서부터 자신을 좀먹어가는 것 같았다. 몇 달 전이면 몰랐을 것들을 이제는 알기 때문이리라.

그나마 다행인 것은 같은 함선에서 생활하면서도 그와 마주칠 일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유독 그가 자주 브릿지에 온다는 것을 모르는 크루들이 없었으나 최근에는 거의 방문하지 않았다는 것 또한, 모두가 안다. 술루는 그것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어쨌거나 자신은 브릿지에서 일을 해야만 했으므로 어떻게든 자리를 피해줄 여건이 되지 않았으니까. 다만 종종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잔뜩 있다는 얼굴로 자신을 쳐다보는 함장과 통신 장교의 시선은 따갑기만 했다.

 

그만 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먼저 이별을 고한 것은 그의 쪽에서다. 예상했던 것이냐고 한다면 그에 대한 대답은 반반이다. 예상하고 있었지만 예상하지 못했다. 아마 곧 그런 말을 할 것 같기는 했지만 적어도 사흘간 앓아눕고 나서 들을 말은 아니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해서 그를 비난하느냐, 하면 그것은 또 아니다. 앞서 말했다시피, 조만간 들을 것 같은 말이었으니까. 아마도, 술루는 그가 자신에게 질렸을 것이라 생각했다. 비참하고 억울하기보다는 당연하다는 생각이 조금 들었다. 술루는 무의식중에 자신이 얼마나 그에게 많은 것을 기대했고, 많은 부분을 기댔는지 알고 있었으니까. 버거웠다고 해도 할 말은 없다.

 

, 알았어요.”

 

다만 이렇게 아플 줄 알았더라면 한 번만 왜, 라고 그 이유라도 물어볼 것을.

 


*


 

너 정말, 아니다. 말을 말자.”

그래, 고마워.”

나는 대체 너 같이 똑똑한 애가 이렇게 미련하게 구는지 알다가도 모르겠어.”

알잖아, 나 원래 그런 거.”

 

오늘의 이야기 상대는 우후라다. 최근에 열심히 도망 다녔으니 이제는 더 이상 도망을 갈 수 없으리라 생각은 했지만 정말 시프트가 끝나고 아예 온실 앞에서 기다리고 있을 줄 누가 알았겠는가.

 

그렇게 실컷 아프고 난 다음에는?”

조금 더 단단해지는 거지. 외로움도 견딜 수 있게.”

나는 애초에 그게 견뎌야 되는 건지 모르겠어.”

그거야 네가 다정한 사람이라서 그래.”

네가 이렇게 말하는 이유도 모르겠고.”

 

달콤한 향이 나는 차가 담긴 유리잔을 내려다보며 우후라는 중얼거렸다.

 

나는 네 생각에 동의하지 않아, 술루.”

무슨 생각?”

그 사람이 너에게 질렸을 거란 생각.”

…….”

오히려 그 반대라고 생각해.”

반대?”

너는 그 사람에게 너무 많은 것을 기대고 있다고 했지만, 정작 그 사람은 반대로 생각했을 거 같다고. 왜 이런 생각이 들게? 지금 내가 딱 그런 생각이 들거든. 너는 좀 더 남에게 기댈 필요가 있어. 좀 더 욕심내도 된다고. 오히려 그것 때문에 힘들었을 수도 있지. 너는 과하게 기대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전혀 안 그렇다니까.”

 

미적지근하게 식어버린 차를 한 번에 털어 넘기며 우후라는 비장한 얼굴로 술루에게 말했다.

 

물어봐.”

?”

가서 물어보라고. 왜 나랑 헤어지자고 했는지.”

우후라, 지금 무슨 소리를…….”

아니면 내가 가서 물어볼 거야.”

우후라!”

물어볼 거야?”

 

이미 각오를 굳힌 우후라의 얼굴을 보며 술루는 대놓고 한숨을 쉬었다. 우후라가 저렇게 나온다면 정말 방법이 없는 것이었으니까. 그러나 우후라가 제안한 것은 적어도 술루의 상식 밖의 일이었다. 하지만 동시에 지금 술루에게 가장 필요한 것이기도 했다. 역시 못 이기겠다니까. 술루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뭐하는 거야?”

……, 오셨어요?”

술루.”

그냥,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서.”

 

생각보다 괜찮은가? 술루는 그 물음을 속으로 삼켰다. 얼굴을 본 것은 거의 일주일만의 일로 혹여 보자마자 무슨 실수를 저지르지는 않을까 걱정하던 것과는 다르게 술루는 태연하게 굴었다.

 

뭔데?”

저랑 헤어진 이유가 뭐예요?”

……?”

말 그대로예요.”

 

본즈는 방금 들은 말을 다시 곱씹어 볼 필요가 있었다. 이게, 대체. 자기도 모르게 거나한 한숨을 내쉬자 움찔거리는 어깨가 보여 더욱 한숨만 나왔다. 헤어진 지 보름, 얼굴을 못 본지 약 일주일. 그렇게 많은 시간이 지난 건 아니었지만 충분한 시간이기도 했던 탓에 본즈는 괜찮을 줄 알았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의 쿼터 앞에 서 있는 술루를 보자마자 괜찮기는 정말 개뿔이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데 와서 다짜고짜 하는 말이, ? 왜 자기랑 헤어졌느냐고?

 

이봐, 미스터 술루.”

…….”

넌 뭐라고 생각하는데. 내가 너랑 헤어진 이유.”

내가 당신에게 너무 많이 바라서, 그게부담스럽고 버거워졌다고 생각하는데요.”

…….”

……본즈?”

세상에, 맙소사. 네가 나한테 말을 해준 게 뭐가 있어, 보여준 게 뭐가 있냐고. 너 그렇게 사흘 동안 앓아눕기 전에도 꼭꼭 숨기기만 하고. 그런 적이 어디 한 두 번인 줄 알아! 내가 진짜 답답해서 돌아버리는 줄 알았다고! 그래서 더 이상 네가 나랑 같이 있기 싫은…….”

? 무슨 소리 하는 거예요? 먼저 좋아한다고 고백한 사람은 나라고요. 당신이 질리면 질렸지, 내가 어떻게 당신한테 질릴 수가 있어요?”

질려? 누가? 내가 너한테?”

 

, 정말. 본즈는 목구멍까지 올라온 욕지거리를 겨우겨우 삼키며 당장 쿼터의 문을 열고 술루를 그 안으로 밀어 넣었다. 이미 누가 보기에도 민망한 대화를 버젓이 밖에서 해버리고 말았지만, 부디 아무도 그 대화를 듣지 않길 바랄 수밖에 없었다.

 

네가 나한테 뭘 그렇게 많이 바랐다고. 아니, 아니다. 지금 너랑 나랑 하는 이 대화가 얼마나 멍청해 보이는 줄은 알아?”

…….”

술루, 진심이야. 이제껏 너 나한테 뭐 해달라고 조른 적 한 번도 없잖아.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말해준 적도 없었어. 알아? 원래 그런 걸 별로 말하는 성격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지만 브릿지에서 피 토하고 실려 들어온 걸 봤을 때 내 심정이 어땠을 줄은 알아? 애인이라는 놈이, 그것도 의사면서. 내가 하나 물어보자. 너 나랑 왜 사귀는 거야?”

……꼭 뭘 해주어야만 할까요.”

?”

……옆에 있어주는 것만으로도 좋은데, 뭘 더 해달라고 할…… 그런 게 없어서.”

그렇게라도 말해주면 좀 좋았냐고.”

 

본즈는 우두커니 서 있는 술루의 몸을 끌어안으며 마음껏 그의 목과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방금 무척이나 감동적인 말을 들은 것 같은데, 이 정도는 괜찮지 않겠어? 결국 본즈는 코웃음을 쳤다. 미련하긴. 누구에게 하는 욕인지 모를 말을 속으로 삼키며.

 

그래서, 어떻게 했으면 좋겠어? 직접 말해봐.”

닥터는 저랑 헤어지고 싶으신가요?”

아니.”

저도요. 계속 나랑 사귀어주세요.”

, 조건이 있어.”

조건이요……?”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는 술루를 보며 본즈는 장난스럽게 키득거리며 술루의 코를 아프지 않게 잡아당겼다.

 

우리가 왜 이 지경이 됐는지는 더 이상 설명하지 않아도 알 테니까. 이제 앞으로 무슨 일이 있으면 나한테 제일 먼저, 가감 없이 솔직하게 말하는 거. 뭘 하고 싶은지,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전부.”

그럼…….”

?”

키스해도 돼요?”

 

술루의 물음에 본즈는 작게 웃음을 터트리며 기꺼이 그에게 입을 맞췄다.








Stay with us #4




16.

나 잘 할 수 있는데.”

시끄러워요.”


예쁘게 사과를 깎던 술루가 날카로운 목소리로 본즈의 말을 맞받아친다. 나 지금 칼 든 거 안 보여요? 이어지는 술루의 말에 본즈는 합죽이처럼 입만 다물 뿐이었다. 스무 바늘정도를 꿰맨 것도 모자라 정말 기적적으로 살아났을 뿐이지, 엉망진창으로 내상을 입은 탓에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있어야만 하는 본즈를 보며 술루는 한숨을 숨기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자신이 깎아주겠다며 사과를 달라고 하니, 한숨이 나올 수밖에.

술루는 이런 본즈의 다정함이 좋으면서도 싫다. 나흘, 고작해야 나흘뿐이었는데 품 안에서 사라져버린 다정함을 울부짖은 날이 너무 서러웠다. 언젠가 이에 대해 경고를 받은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안다. 알고 있어야했던 것들, 알아야만 했던 것들. 하지만 모르는 척 했던 것들.

하마타면 손가락을 벨 뻔 한 것을 겨우 빗겨가며 술루는 태연하게 사과를 마저 깎았다. 예쁜 토끼 모양의 사과 조각이 옹기종기 접시 안에 모인다.


먹어요.”

이렇게 귀여운 걸 어떻게 먹지?”


본즈에게 건넨 접시에 있던 사과를 제일 먼저 가져간 것은 다름 아닌 커크였다. , 저 사과귀신. 본즈가 혀를 차며 두 번째 사과조각을 집어 들었다.


, 이거 술루가 나 먹으라고 깎아준 거거든.”

그런 게 어디 있어. 술루가 깎아준 게 왜 네 거야. 우리 거지. 그치?”

나 아까부터 칼 들고 있다고 말했는데.”


이윽고 커크까지 합죽이가 되어 얌전히 본즈의 침대에 앉아 묵묵히 사과를 집어먹었다.

 

 

 

17.

.”

미쳤다고 내가 너를 두고 가냐. 정신 차려, 본즈.”

둘 중 하나는, 있어야할 거 아니야.”

그건 마지막에 네가 해야 되는 일일수도 있으니까 우리 이제 그만 조용히 하고 걷자, ?”

미련한 꼬맹이.”

뼈밖에 없는 의사선생한테 듣고 싶지는 않은데.”


본즈는 커크에게 자신을 두고 가라 말했던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커크는 그 사실을 술루에게 절대로 말할 생각이 없다.

 

 

 

18.

한동안 본즈와 커크는 술루의 심기를 요만큼이라도 건드리지 않으려 노력했다. 한 번 화가 나면 얼마나 무서운 지 잘 알고 있는 만큼 알아서 꼬리도 살랑살랑 흔들어보고 애교도 피워보고 별 짓을 다했지만 소용없었다. 그만큼 이번에는 술루가 단단히 화가 났다는 뜻이다.

그러나 만에 하나같은 일이 또 다시 일어날지라도 본즈와 커크는 똑같은 선택을 할 생각이었다. 술루가 화가 난 것은 그 둘이 그럴 줄 알기 때문이었다. 그랬기에 더더욱 화가 났다. 서운했다. 그렇지만 알고 있다. 무엇이 더 술루를 위한 길이냐를 따졌을 때, 설령 자신이 죽더라도 술루를 선택할 사람들이었으니까.


시간을 필요한 것 같아요?”

무슨 시간?”

이 모든 것에 대하여 생각할 시간.”


술루는 더 이상 모른 척을 그만하기로 했다.

 


 


그래서 우리 집으로 왔어?”

갈 곳이 없어서.”

못 살아, 정말.”


핀잔을 주면서도 우후라는 기꺼이 문을 열어주었다. 술루는 연신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등에 매고 있던 가방을 내려놓았다. 짐까지 가져왔어? 가방을 보고 기겁하는 우후라를 보며 술루는 두 손을 모으며 말했다.


내가 설거지랑 빨래랑 청소랑…… , 원한다면 삼시세끼 다 해줄게.”

돈 한 푼도 안 가져왔단 말이야?”

두 사람 돈이잖아. 내가 어떻게 가져와. 불편하겠지만 좀만 참아주라, ?”


한숨을 쉰 우후라는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적어도 지금, 술루는 아주 중요한 선택의 갈림길에 서 있는 것을 우후라는 이해하고 있었기에.


그래서 이제 어쩌려고 여기까지 오셨을까.”

내가 그동안 너무 안일하게 생각했어.”

그걸 이제 알았어?”

……그러게.”

뭐하는 거야, 히카루 술루.”

…….”

너 내가 그렇게 뭐라 그럴 때에는 절대 아닐 거라고, 네 말이 맞다고 그렇게 우겼잖아. 그 황소고집 부리던 사람은 어디를 가고 이렇게 순한 양이 돼서 찾아왔어?”


우후라의 말에 술루는 쓰게 웃으며 따놓은 캔 맥주를 벌컥벌컥 들이켰다. 뇌까지 울릴 것처럼 시원하고 고소한, 씁쓰름한 액체가 식도를 타고 넘어갈 때의 쾌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는 것들 중 하나였으나 지금은 마냥 쓰기만 했다.


다 내가 변하는 게 무섭대. 나를 이상한 세계로 끌고 와서 겪지 않아도 될 일들을 겪게 하고, 그 탓에 내가 변할까봐. 그럴까봐 숨기고, 걱정도 시키지 않으려 하고 감추기만 하고.”

그런데?”

정작 걱정해야 하는 건 내가 아니잖아.”

…….”

내가 변하는 건 무섭지 않아. 나는 변해도 괜찮아. 하지만 만약 나 때문에 그 두 사람이 예전과 같지 않아서 만에 하나 잘못되기라도 하면 어떡해? 나를 선택했기 때문에 정작 자기들은 위험에 빠지는 걸 방관만 하고 있잖아.”

술루.”

그렇게 사라져버리면, 나보고 어떡하라고. ……나 이렇게 겁쟁이가 돼서 어떡해?”


우후라는 조심스럽게 술루의 손에서 맥주 캔을 내려놓고는 아이를 달래듯 품에 안은 채로 부드럽게 말했다.


글쎄, 그게 당연한 거야. 원래 누구든, 다 겁쟁이가 되는 거야. 네가 나쁜 게 아니야. 네가 잘못한 게 아니야. 물론 그 사람들도 잘못한 건 없어. 그저 조금 안타까울 뿐이지. 평범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을 하는 건 당연한 거야. 그 사람들을 배신하는 게 아니야.”


술루는 부끄러움을 뒤로 하고 한동안 우후라의 품에 안겨있었다.

 

 

 

19.

이게 이런 기분이었나. , 하고 내뱉은 연기가 아스라이 공기 중으로 녹아내렸다. 이윽고 담뱃재가 바닥으로 툭 떨어져 내린다. 술루가 보면 기겁을 하며 싫어했을 텐데, 따위의 생각을 하며 커크는 또 다시 담배를 물었다. 담배연기를 싫어하는 술루를 위해 근 넉 달간 끊었던 담배를 다시 물자니 어색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더 어색한 건, 담배 냄새를 싫다고 말해줄 사람이 없는 집이었다.

정작 떠나가고 싶을 때, 도망가고 싶을 때, 놓아준다고 해놓은 주제에.


거짓말이란 거짓말은 주구장창 했잖아.”


막상 그 때가 오면.

 

 

 

20.

……우후라?”

……당신이 나를 어떻게 알고 있는지, 묻지 않아도 알 것 같으니까 그건 넘어가고. 혹시 술루 못 봤어요?”

술루? 술루라면 네 집에 머물고 있잖아.”

그랬죠, 어제까지. 잠깐 집에 돌아간다고 나가놓고서 오늘 학교에도 안 나왔다고요. 말이 안 되죠, 식물 관찰 강의는 술루가 제일 좋아하는 교양이니까.”


순식간에 무섭게 날카로워지는 커크를 보며 우후라는 가장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가정이 맞아떨어졌음에 탄식했다.


술루는…….”


순간, 우후라의 핸드폰이 울렸다. 때 아닌 전화 벨소리에 깜짝 놀란 우후라는 액정에 뜬 이름을 보자마자 커크에게 핸드폰을 넘겼다.


받아요, 내 전화는 아닌 것 같으니까.”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네가 받아줄 줄 알았어.

괜찮아?”

- …….

술루.”

- 나 꼭 데리러 와야 해, 알았지?

. 내 모든 걸 걸고서라도.”


까맣게 변한 액정을 보며 커크는 맹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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