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PS
‘있을 때 잘할 걸.’ 칼은 최근 이 말의 뜻을 절절히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아니 확실하게 칼은 자신이 이제까지 너무 바보같이 굴었음을 인정했다.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까만 휴대폰 액정은 그런 칼의 마음을 대변해주듯 흔한 메시지 알람 하나 없었다. ‘늦었다고 생각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이다.’라는 말도 어렴풋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칼은 서둘러 침대 위에 널브러져 있던 재킷을 꿰입으며 집을 나섰다. 새벽 1시가 조금 넘은 시각이었다.
*
이제 곧 고등학교 졸업을 앞두고 있는 칼에게는 세상이 두 쪽이 나도 변하지 않을 ‘친구’가 한 명 있었다. 그의 이름은 존이다. 존과는 얼굴을 알고 지낸지가 벌써 15년이 넘은, 얼굴을 보지 않은 날이 얼굴을 본 날 보다 적은 친구였다. 바로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아이들이 친해지지 않으면 더 이상했을 것이고, 덕분에 부모님들의 사이도 또래 친구들과 같을 정도가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그렇게 되어 있었다고 해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 정도로 칼에게는 존의 존재가 너무나도 당연했고, 그만큼 익숙했다.
아무리 옆집에 사는 동갑내기 아이라고 할지라도 성격이 맞지 않다거나, 둘 중 하나가 다른 하나를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이 있다면 15년의 우정은 이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칼과 존은 성격도 확연하게 다를 만큼 엄청난 차이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았고, 취향은 거의 비슷한 편이었다. 다만 칼이 좀 더 얌전하다면 얌전한 편이었고, 존이 좀 더 과격한 쪽에 가까웠다. - 대체로 두 사람이 좀비 영화를 볼 때에는 존의 의견이 적극적으로 반영된 것이었다. -
칼은 존이 참 멋진 친구라고 생각했다. 그는 거침없는 직구를 날리는 털털한 성격의 소유자였고, 그것 때문에 쓸데없는 다툼에 자주 휘말리기도 하는 편이었지만 대체로 또래 친구들에게는 인기가 많은 편이었다. 가끔 멍청한 녀석들이 존이 동양인이라며 놀려댈 때마다 그들을 다 무찌른 - 정말 문자 그대로 무찔렀다. 칼은 그런 존을 보며 헐크 같다고 했다가 엄청나게 맞았다. 나중에서야 알았지만 존은 ‘태권도’ 라고 하는 한국의 무술 유단자였다. 젠장, 까불지 말걸. - 존을 진정시키는 것은 자신의 역할이었다. 모르긴 몰라도 존은 자신의 말이라면 철썩 같이 들어주는 편이었다고, 칼은 그렇게 생각했다.
“이거 너 전해달래.”
“뭔데?”
“뭐겠냐, 러브레터지.”
“이젠 러브레터 배달까지 해주는 거야?”
존은 키득거리며 칼의 손에 있던 편지 봉투를 집어 들었다. 그러게, 내가 이제 네 형 노릇도 모자라 네 러브레터를 대신 전해주는 역할까지 한다. 칼의 한숨 섞인 말에 존이 눈을 치켜뜨며 칼을 바라보았다.
“형? 네가 왜 내 형이야?”
“내가 먼저 태어났잖아.”
“고작해야 9일 밖에 차이 안 나잖아!”
“내가 9일 먼저 세상에서 으앙, 하고 있을 때 아직 바깥 구경도 못해본 꼬맹이가. 그리고 평소 네가 하는 거 보면 내가 형 맞잖아, 이 천둥벌거숭이야.”
동갑 사이는 이렇게 한 없이 유치해지기도 했다. 칼은 물론이요, 존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서로 너 유치해, 라는 말을 하지는 않았다. 둘 다 똑같았으니까.
“예뻐?”
“아, 얼굴 제대로 못 봤다.”
“뭐야? 나 참, 배달부 역할도 제대로 못 해서 이걸 어디다 써 먹지?”
“그럼 어뜩하냐. 이것만 전해달라고 후딱 손에 쥐어주고 달려가 버렸는데.”
존은 샐쭉 웃으며 편지 봉투를 가방에 넣었다. 칼은 어쩐지 그 봉투가 신경 쓰였다. 다름이 아니라 혹시 존에게 여자 친구가 생긴다면, 우리는 어떻게 될까, 하는 의문이 들었던 탓이다. 학교를 갈 때나 집으로 갈 때나, 보고 싶은 영화가 있다거나, 하고 싶은 게임이 있다거나…… 이 모든 일을 지금까지 함께 해왔으니 어련하겠는가. 칼은 이때까지 존과 함께해왔던 시간들에 존의 여자 친구, 혹은 자신의 여자 친구의 모습을 같이 그려보았다.
“……이상하네.”
어색하기 그지없는 상상에 칼은 얼른 그 생각을 지워버렸다.
*
그러니까, 그 때에는 그게 왜 어색하게만 느껴졌냐 하면, 그 생각 속 칼과 존은 여전히 ‘함께’였기 때문에 어색할 수밖에 없었던 탓이다. 칼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렇게 생각했다. 아마 존의 결혼식 때에는 자신이 존의 베스트맨이 될 것이었고, 존에게 아이가 생긴다면 그 아이에게 가장 친절하고 상냥한 삼촌이 되지 않을까. 이런 생각이 바탕으로 깔려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린 순간, 칼은 경악했다. 정말 존을 친구가 아니라 자신의 동생이라도 된 것 마냥 여기고 있던 탓이다.
바로 옆집이니 집에서 나오면 금방인 거리를 뱅글뱅글 돌면서 존에게 연락을 할지 말지 고민하고 있는 찰나, 칼은 2층 존의 방에 불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용기를 내었다. 시계는 1시 30분을 가리키고 있었다. 쟤는 왜 아직도 안자고 있는 거야. 처지는 자신도 똑같으면서 괜히 존의 방을 보며 입술을 비죽 내민 칼은 핸드폰으로 존에게 문자를 보냈다.
- 문 열어줘. 열어줄때까지 기다릴 거야.
사실 칼에게는 존의 집 스페어 키가 있었다. 그건 존도 마찬가지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준 것은 아니었고 서로의 부모님이 하나씩 챙겨주셨다. 혹시라도 본인들이 없을 때 남은 쪽을 잘 챙겨주라는 의미로. 칼은 그 스페어 키를 사용할 생각이 눈곱만큼도 없었다. 존이 열어줄 때까지 무작정 기다리기로 했다. 이제 기다림이라고는 지긋지긋했지만, 이번이 ‘마지막’ 기다림이라는 생각으로.
*
존이 러브레터를 받고 얼마 지나지 않아, 존은 그 아이와 사귀게 되었다. 다시 보게 된 그녀는 존과 잘 어울렸다. 칼은 조금 어색하다는 느낌을 감출 수 없었지만, 존의 여자 친구이니 만큼 최대한 잘 대해주려고 했다. - 왜 자신이 존의 여자 친구에게까지 잘 해줘야 하는지는 몰랐다는 게 코미디였다. -
존과 그녀, 그러니까 수잔은 꽤 오래도록 사귀었다. 러브레터를 전해줬을 때와는 다르게 수잔은 존과 꽤 비슷한 성격의 사람이었다. 이런 사람이 그렇게 부끄러워하면서 러브레터를 대신 전해달라고 했었다고? 칼은 이 점이 제일 놀라웠다. 그리고 또 한 가지 놀라운 점이 있다면 수잔을 대하는 존의 모습이었다. 아니, 사실 놀랄 거리는 아니었다. 연인에게 다정한 건, 당연한거니까. 그저 칼이 익숙하지 않았을 뿐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칼은 존을 대하는 것이 점점 어려워졌다. 둘만의 시간이 필요한 것은 연인에게는 당연한 일이었기에 칼이 자연스럽게 빠지게 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존은 늘 칼의 동행여부를 물었다. 칼은, 그게 불편했다.
“너 나한테 맨날 같이 다니자고 물어보는 거 수잔이 뭐라고 안 그래?”
“뭐가?”
“너희 데이트하는데 왜 날 계속 데리고 가냐고.”
“수잔도 너 좋아하잖아. 그리고 너 없다고 우리가 할 짓을 못 하냐?”
“아니, 그거야……. 맞다, 내 생각은 안 해?”
“뭐? ……아, 그래. 어, 미안하다. 생각을 못했네.”
그러나 그 모든 것을 다 떠나, 칼이 제일 불편했던 건.
'네가 왜 그런 표정을 짓는 건데.'
서운해보이던 존이었다.
*
프롬 파티가 다가오면서 학교는 떠들썩했다. 존의 파트너는 의심할 여지없이 수잔이었고, 칼의 파트너는 없었다. 세상에, 칼의 프롬 파트너가 없다는 소문이 전교에 쫙 퍼졌고, 금세 칼의 교실은 시끌시끌했다. 너한테 관심 많은 애들이 얼마나 많은 줄 아냐며 저마다 한 명씩 소개시켜주겠다고 야단이었고, 심지어는 수잔이 자신의 친구를 소개시켜주겠다는 것을 마다하며 칼은 파트너 없이 프롬에 참석하겠다고 선언했다. 원래 칼이 그런 자리에서 으스대면서 자신의 파트너를 뽐내거나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것쯤이야 알고 있다지만, 아무리그래도 고등학교의 마지막 프롬 파티에 파트너도 없이 덜렁 가겠다는 칼을 보는 존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는 않았다.
“너 정말 그냥 갈 거야?”
“그게 뭐 대수라고 너까지 신경을 써?”
“…….”
“존?”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래, 넌 원래 그런 성격도 아니었으니까. 됐다. 오늘은 먼저 가. 나 수잔이 입을 드레스 같이 보러 가야해.”
“어, 어…….”
그 날 이후 존은 칼과 함께 다니는 시간을 거의 반 이상 줄였다. 두 사람을 잘 아는 친구들은 드디어 갈라졌나는 둥, 제 갈길 가기로 했냐는 식의 말을 했지만 칼은 그 말의 뜻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교실 밖에서 먼저 기다리고 있던 수잔의 팔짱을 끼며 교문 밖으로 나서는 존을 보며 칼은 이상한 기분이 드는 것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벌써부터 두 사람의 뒷모습은 화려한 슈트와 드레스를 입고 반짝이는 샹들리에 밑으로 걸어가는 것처럼 보였다. 그리고 칼은 점점 더 스스로에게 한심함을 느꼈다. 속상한데, 대체 무엇 때문에 속상한지 몰랐으니까. 존에게는 있는 여자 친구가 자신에게는 없어서? 수잔이 자신의 취향인가? 아니, 자신의 취향은…….
“젠장.”
정말, 한심했다.
개나리가 활짝 핀 것 같은 샛노란 색 드레스는 수잔에게 정말 잘 어울렸고, 수잔은 드레스를 같이 봐 준 답례로 존의 슈트를 골라주었다. 가장 무난하고 깔끔한 검은색 슈트를 고를 줄 알았더니 웬걸, 밝은 회색빛이 도는 하얀색 슈트를 골라주는 탓에 존은 조금 어색해하며 그 슈트를 받아들었다.
“검은색 말고?”
“응, 이게 잘 어울려. 칼이 검은색을 입고 올 테니까 네가 하얀색인 게 좋을 것 같거든.”
“수잔. 내 파트너는 너야, 칼이 아니라.”
“마음에도 없는 말 한다. 얼른 입고 와. 직접 입어봐야지.”
존은 순순히 수잔의 말대로 슈트를 입고 나왔다. 몸에 딱 맞는 슈트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게 잘 맞았다. 수잔은 자신의 안목에 감탄하며 존의 목에 직접 넥타이를 매주었다.
“프롬도 끝나면 이제 정말 끝이잖아. 너 자취할 거잖아. 아예 다른 도시에서. 칼한테 버클리 합격했다는 말도 안 했지?”
“응.”
“끝내려고?”
“그래야지.”
“지금은 내가 네 여자 친구라지만, 정말로 이상해. 이건 정말 말도 안 되는 관계라고.”
“미안해.”
“너한테 사과 받으려고 한 말 아니거든. 하긴, 애초에 네 거절 다 듣고도 널 도와주겠다고 한 내가 제일 이상하지.”
“알긴 아네.”
수잔은 아프지 않게 존의 볼을 꼬집으며 말했다.
“으이구, 내가 지금까지 도와준 게 뭐가 되냐고, 존 조! 대체 누구야? 너한테 미친 싸움닭이라고 별명 붙여준 사람.”
“칼.”
“……방금 나 정말 진심으로 질리려고 했어. 진짜 드라마 속에서만 나오는 줄 알았는데, 아니네.”
“그 드라마가 현실을 기반으로 써지는 건 아시죠, 수잔 작가님?”
“아서라, 지금 너희 둘과 내 관계에 대해 스토리를 쓰면 대박 칠 것 같으니까.”
수잔은 예쁘게 웃으며 손가락으로 존의 입 꼬리를 양쪽으로 밀어 올렸다. 어설프게 웃는 존의 얼굴을 보며 수잔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있잖아, 수잔.”
“응.”
“만약 이대로 모든 게 다 끝나면, 나랑…….”
“싫어.”
“……역시 그렇지?”
“하지만 칼과 알고 지낸 만큼의 시간이 흐른 뒤에도 그 마음에 변함이 없다면 사귀어줄게.”
“기다려줄 거야?”
“네가 하는 거 봐서.”
존은 수잔을 따라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응, 내가 많이 미안해.
*
- 나 아직도 기다리고 있는데. 새벽이라 춥다.
30분 째 묵묵부답인 핸드폰을 붙잡고 여전히 불이 켜진 존의 방을 바라보며 칼은 발을 동동 굴렀다. 추우면 지금이라도 집으로 꺼지던가! 하고 외칠 줄 알았더니 그마저도 없다. 철저하게 침묵을 지키며 무시하는 것을 보니 괜히 칼도 오기가 생겼다.
칼은 지금까지 존이 버클리에 합격한 줄도 몰랐다. 어떻게 그런 중요한 사실을 말하지 않을 수 있지? 버클리 대학에 다니기 위해서는 당연하게도 존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을 떠나야만 했다. 이 사실을 프롬 당일까지 모르고 있던 칼은 뒤통수를 망치로 얻어맞은 것처럼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처음으로 든 생각은 어떻게 자신에게 말하지 않았지, 라는 생각이었지만 그 다음으로 바로 든 생각은 안 그래도 최근 한심하게 느껴졌던 자신을 더욱 한심하게 만들어버렸다. 어떻게, 내가 그 중요한 사실을 모를 수 있었지? 이제껏 존에 대해서는 찌르면 바로바로 대답을 할 수 있을 만큼 모르는 것이 없었는데. 그만큼 칼은 자신이 존에 대해 모르는 것이 생겼다는 것과, 존의 부재에 대한 심각성 - 정확히는 존의 부재가 자신에게 미치는 심각성 - 을 처음으로 깨달았다.
어떤 정신으로 프롬에 참석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분위기에 휩쓸리듯 도착한 무도회장에서 칼은 존을 찾는 것을 멈출 수 없었다. 존은 수잔과 함께 샴페인을 마시고 있었고, 칼은 고민할 필요도 없이 존에게 다가가려 했다. 존이 수잔의 손을 잡는 것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그랬을 것이다.
서운함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 존이 대단한 대학에 합격했는데 자랑 한 번 안 해줘서? 언제 이사를 갈 건지조차 말해주지 않아서? 수잔의 손을 잡고 있어서?
“…….”
그가 자신을 떠날 것이기 때문에. 무도회장에서 흘러나오는 음악은 전혀 칼의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존이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 목소리만 귀에 바로 꽂혀들었다. 칼은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성큼성큼 그에게 다가갔고, 존이 그의 이름을 부르며 인사하기도 전에 그에게 입을 맞췄다.
- 멍 빼는데 달걀이 그렇게 좋다던데, 사실이야?
순식간에 그 주변은 아수라장이 될 것 같았지만, 사실은 그러지도 않았다. 단지 붙어있던 입술을 떼자마자 정말 있는 힘껏 자신의 얼굴을 주먹으로 친 존 덕에 제법 큰 소리가 났다. 다행인 것은 무도회장에 흐르는 음악소리가 그만큼 컸으니 망정이었다는 것이다. 근처에 있던 사람들이 놀라움에 섞인 신음소리를 냈던 것 같지만 그마저도 음악소리에 묻혔다. 칼은 돌아갔던 고개를 천천히 돌려 존을 바라보았다.
“넌 정말 멍청하고 뻔뻔한 새끼야, 칼 어반.”
“…….”
“어떻게, 어떻게…….”
“그러는 너는, 어떻게 나한테 한 마디 말도 없이 그럴 수 있어?”
“지금 나한테 화내는 거야? 네가 뭘 잘했는데?”
“버클리?”
“…….”
“나한테 단 한 마디 말도 없이 떠나겠다고?”
방금 자신이 뱉은 말이, 정말로 스스로 한 것이 맞나 싶을 정도로 무겁고 날이 선 말투라 칼 본인도 놀랐다. 한 번 튀기 시작한 불꽃은 이제 활활 타오르기 시작했다. 원래 불이라는 것이 그렇지 않은가. 자기도 모르는 새에 싹, 다 태워버리는.
“요새 집도 안 오고, 기껏 너 기다렸더니 약속 핑계로 가버리고, 내가 늦잠 쳐 잘 때 깨워주지도 않고. 네가 끝내주는 대학 합격했다는 말을 내가 교무실 가서 들어야겠냐? 심지어 그게 버클리래. 여기서 2시간 걸리는 버클리! 곧 자취할거라며. 그런데 나한테 말도 안 해줘? 왜 그랬는데!”
“…….”
“존!”
“좋아해서 그랬다, 이 개새끼야!!”
“…….”
“나라고 뭐 좋아서 그런 줄 알아? 맨날 형이니 아빠니 운운하는 새끼 뭐가 좋다고 내가! 장장 16년을 온갖 거지같은 꼴은 다 보고 같이 자라온 새끼가 뭐가 좋다고!! 적어도 난 진심인데 넌 아니니까, 너 포기하려고 그랬다. 떨어져있으면 포기할 수 있으니까 그랬다고. 그거 알아? 너나 나나 지금 수잔한테 무릎 꿇고 빌어도 모자라. 수잔이 나 도와줬거든! 내가 너 좋아하는 거 알고도 자기가 도와주겠다고! 그런데 이 빌어 처먹을, 여기가 어딘데, 여기가 어디라고……!”
존은 그대로 분에 찬 듯 수잔과 함께 무도회장을 아예 나가버렸다. 샛노란 드레스 자락이 흩날리는 것이 시야에 아득하게 느껴질 때 쯤, 칼은 그 자리에 주저앉았다. 좋아해서, 그 목소리가 계속 에코처럼 머릿속에 울렸다. 점점 부어오르기 시작한 뺨이 화끈했다. 열이 올랐다.
- 존
시계는 어느덧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초인종을 누를까 고민했지만, 안에 계신 존의 부모님께 폐를 끼칠 수는 없었다.
- 존, 미안해. 얼굴 보고 얘기하자, 응?
- 하고 싶은 말 있어. 꼭 해야 해. 오늘 가기 전에 해야 한다고.
- 아니면 전화라도 받아줘, 지금 걸게.
통화 버튼을 누르자마자 문 바로 건너편에서 들리는 벨소리에 하마타면 억지로 문을 열고 들어갈 뻔한 마음을 겨우 억누르며 말했다.
“미안해.”
“…….”
“하지만 이거 하나만은 말해야겠어. 존, 네가 틀렸어. 내가 아무렇지 않을 리가 없잖아. 진심이 아닐 리가 없잖아. 아니었으면 너한테 그 짓도 안 했어. 나는 당연히 네가 수잔이랑 사귀는 줄 알았지. 그래서 내가 너한테서 떠나야한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그게 잘 안 되더라. 서운했다고. 나도 알아. 나 멍청이라는 거. 뭐에 서운한 지도 모르는 주제에 서운했어. 그런데 이제는 알아. 존, 나도 안다고.”
“…….”
“나 너랑 떨어지는 거 싫어. 널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는 것도 싫어. 네가 다른 사람이랑 사귀는 것도 싫어. 그래도 버클리는 가야겠지. 좋은 대학교잖아.”
“……그래서 어쩌자고.”
“일단 이 문 좀 열어주면 안 돼?”
“키 있잖아.”
“네가 직접.”
칼은 천천히 열리는 문을 급하게 잡아당길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문이 열리는 수십 초가, 칼에게는 수십 분과 같았지만 곧 문이 다 열리고 나타난 존의 모습에 칼은 할 말을 잃어버렸다. 고작 몇 시간 보지 못했을 뿐인데 엄청난 존의 모습에 칼은 얼른 존의 얼굴에 자신의 손을 대보았다. 그러자 존이 소스라치게 놀라며 칼의 손을 쳐내려고 했지만, 칼이 요령 좋게 그 손을 피했다.
“야.”
“존.”
“…….”
“나 피하지 마, 응?”
“……지가 잘한 게 뭐가 있다고.”
“없어, 나 잘한 거 없어. 그러니까 앞으로 잘할게.”
잔뜩 피곤에 절은 얼굴을 보며 안타깝다는 듯 웃는 칼을 보며 존은 가만히 눈을 깜빡깜빡 거릴 뿐이었다.
“너 아까 내가 한 말 들었지.”
“물론이지.”
“나한테 잘 해라.”
“아무렴, 내가 너한테 맞고 살아남은 유일한 사람 아니겠어?”
“야.”
“좋아해, 존. 너무 늦게 알아차려서 미안해. 진짜로.”
“…….”
“그러니까, 키스해도 되지?”
“우리 부모님한테 들키고 싶으면 그렇게 하시던가.”
존의 퉁명스러운 대답에 칼은 망설임 없이 존에게 입을 맞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