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appy Ending
W. 락향
DCEU 브루스 웨인 x 배리 앨런 | 첫 키스
DC Comics 제이슨 토드 x 브루스 웨인 | 가장 간단한 만찬
The Flash 해리슨 웰스 x 배리 앨런 | Star
2016년 8월의 어느 여름 날
※ 본 책은 총 3가지의 단편이 들어있는 책으로, 각각 커플링이 다릅니다. 원하시는 글만 읽으실 수 있도록 접어놓았습니다.
2016년 여름, 4인의 론리전에서 발간된 책으로 저를 제외한 나머지 세 분의 리퀘스트로 이루어진 책입니다.
배리 앨런은 뭐든지 빠른 사람이다.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빨리 달릴 수 있는 만큼, 생각을 실천으로 옮기는 것도 수초면 충분하다. 그랬기에 이번에도 망설임 없이 뛰어들었다. 그저 그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으니까. 순식간에 뿜어져 나오는 레이저 광선이 그를 맞추기 전에 용케 그 사이를 가로막고 선 플래시는 그대로 광선에 맞아 허공을 날았다. 전기에 의한 충격은 둘째 치고 바닥에 부딪혀 생길 2차 충격을 느끼기도 전에, 플래시는 무척이나 안정적으로 허공에 자신의 몸이 붕 뜨는 것을 느끼며 안도했다.
“괜찮아?”
“덕분에, 고마워.”
그 사이 가볍게 강도들을 제압한 뒤 슈퍼맨과 자신에게로 걸어오는 커다란 검은색 망토를 보며 플래시는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얼른 슈퍼맨의 품에서 내려온 플래시는 땅에 두 발을 딛고 똑바로 서기 위해 노력했으나 안타깝게도 몸 상태가 그리 완벽하지 못한 탓에 주저앉을 뻔 했다.
“플래시.”
“잘못했어요. 한 번만 봐주면 안 될까요? 나는…….”
“나는 아직 한 마디도 안 했어.”
“할 거잖아요.”
배가 욱신거리는 기분이다. 최첨단 소재로 만들어진 코스튬 덕에 부상은 경미한 수준일 것이고, 결과적으로 자신의 몸은 세포의 재생속도가 빠른 탓에 다쳐도 금방 나으니 부상에 대해 크게 신경을 쓰는 편은 아니었는데 이상하게 배가 아프다.
“돌아가서 좀 봐야겠어.”
그 때쯤이면, 이미 상처는 다 나았을 테지만. 플래시는, 배리는 애써 그 말을 삼키며 배트맨의 뒤를 따랐다.
* * *
배리는 브루스와의 첫 만남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다. 하기야, 어떻게 잊겠는가. 브루스뿐만이 아니다. 클락을 만났을 때도 그랬다.
원래부터 배리는 ‘슈퍼맨’과 ‘배트맨’을 동경했고, 존경해마지 않았다. 그래서 슈퍼맨이 죽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삼일동안 밥을 굶었다.
“배리 앨런, 브루스 웨인이네.”
“그 한 마디로 불도 켜지 않고서 내가 두 번째로 아끼는 의자에 낯선 남자가 앉아있는 상황을 설명하려는 건 아니겠죠?”
그러던 어느 날, 소리 소문도 없이 찾아온 브루스 웨인이라는 남자는 평소 자신이 동경하던 그 배트맨이었고, 함께 하겠냐는 물음에 1초의 망설임도 없이 Yes, 라는 대답을 내놓았다.
시간은 너무나도 빠르게 흘러갔다. 그 뒤로 새로운 친구들도 사귀게 되었고 심지어는 슈퍼맨이 다시 부활하여 친구가 되기까지 그 모든 일련의 시간이, 그 모든 일이 꿈만 같았다. 그러나 그 중에서도 제일 꿈만 같았던 것이 있었다.
“배리 앨런.”
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 브루스 웨인의 목소리.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후 배리는 자신의 방에 걸려있는 커다란 화이트보드에 브루스 웨인에 대해 아는 것은 모조리 적어보았다. 억만장자, 고담의 재벌, 귀족……. 정말이지, 눈곱만큼도 아는 게 없었다. 인터넷은 두어 무얼 하나. 그러나 인터넷 검색창에 브루스 웨인의 브루, 까지만 쳤을 뿐인데도 마치 봐서는 안 되는 것을 본 것처럼 엉망으로 쏟아져 나오는 기사에 배리는 가만히 인터넷 창을 다시 꺼버렸다. 결국 원점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래서 배리는 행동하기로 한다. 할 수 있는 만큼 오랜 시간을 그의 곁에 찰싹 붙어서 보냈고, 그를 관찰했다. 구태여 그에게 말을 걸지는 않았다. 물론 물어보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었지만, 배리가 느낀 브루스는 그다지 말을 많이 하는 성격은 아니었고 시끄럽고 조잘거리는 것보다는 무게 있고 진중한 타입이었으니 아무렴, 그랬다. 그래서 자신이 그를 쫓아다니게 된 이후로, 그를 쫓아다니지 않으면 하나 둘 다가와 왜 오늘은 배트맨의 뒤를 쫓아다니지 않는 것이냐고 묻게 됐을 때, 배리는 처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따라다녀도 괜찮았어요?”
“내가 싫다고 해도 했을 것 같았거든.”
그는 참으로 현명하다. 웃어 보이며 그의 뒤가 아닌 그의 옆에 서자 비로소 브루스가 먼저 자신을 돌아보는 것이 느껴졌다. 고개를 살짝 들자 시선이 마주쳤고, 브루스는 그의 성격답게 신중한 손길로 배리의 머리를 살짝 헝클어트렸다. 배리는 그 때 비로소 자신이 왜 브루스라는 사람을 이렇게까지 알고 싶어 했는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다.
* * *
“이미 다 나았을걸요.”
“그래서?”
“그러니까 굳이 여기서 옷까지 벗을 필요는…….”
“있으니까 벗어.”
배리는 속으로 탄식을 삼켰다. 저런 얼굴로 저런 말을 하니까 괜히 무섭다. 하긴 그는 배트맨이다. 무서울 법도 하지. 배리는 얼른 상의를 벗어내고는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한 몸을 브루스에게 보여주었다.
“봐요, 상처는 없을 거라고 했잖아요.”
“배리.”
“…네?”
“알아. 네 상처가 이미 다 나았다는 것도, 흔적도 남아있지 않을 거란 것도.”
“…….”
“별로 썩 유쾌한 기분은 아니거든.”
브루스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고는 장갑과 카울을 벗고는 의자에 앉아 모니터 화면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그 자리에 못이 박힌 듯 멀뚱멀뚱 서 있던 배리는 얼른 모니터와 브루스 사이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섰다. 능력을 사용한 탓에 바람이 일어 차마 정리해놓지 못했던 서류가 펄럭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누가 나한테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무슨 말?”
“이상하게 브루스는 나에게 관대하다고.”
“그래서?”
“그 말이 사실인가 궁금해서요.”
화사하게, 조금은 개구지게 웃는 배리를 보며 브루스는 살며시 미간의 주름을 잡고는 말했다.
“첫째, 나는 너에게 관대하지 않아. 둘째, 관대하지는 않지만 다른 말로 표현할 수는 있지.”
가볍게 배리의 허리를 끌어 당겨 자신의 다리 위에 앉힌 브루스는 예의 그 화려한 미소를 지어보이며 말했다.
“싫다면 지금…….”
“Stop right there.”
"그거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인데."
그게 그와의 첫 키스였다.
세상이 모르는 브루스 웨인의 단점을 하나 꼽자면, 그는 최악의 주방 학살범이다. 제이슨 토드는 그를 그렇게 일컬었다. 주방 학살자.
겉으로는 멀쩡하게 생겨서는 돈도 많고 말도 잘해 이 사람 저 사람 다 자기편으로 만들어버리는 남자가 주방에만 들어서면 아무것도 못하는, 아니 그것보다 더한 사람이 되고 만다. 어디 주방뿐이랴. 제이슨은 본 적이 있다. 분명 자신이 알려준 대로 세탁기에 표백제와 섬유유연제를 넣었음에도 불구하고 세탁기가 거품을 토해내는 일이 바로 눈앞에서 벌어지는 것을. 그 뒤로 제이슨은 두 번 다시 브루스에게 가사를 시킨 적이 없다. 갑자기 이런 생각이 난 것은 지금 현재 자신이 주방에 있고, 브루스가 침실에 있기 때문이었다.
식욕을 자극하는 적당한 기름 냄새와 고소한 냄새가 주방을 뒤덮었다. 제이슨은 능숙한 손길로 단번에 핫케이크를 뒤집었다. 노릇하게 구운 옅은 갈색 반죽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어보일 정도였다. 예쁘게 접시에 담긴 베이컨과 핫케이크, 적당히 익은 계란프라이의 조합은 무난하고 딱 좋을 만큼 풍족했다.
“……제이슨.”
“일어났네.”
심해의 저 바닥끝도 얕게 느껴질 만큼 무겁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들린다. 흉하게 갈라지는 목소리를 갈무리하기 위한 헛기침이 두어 번 더 들렸지만 여전히 브루스의 목소리는 형편없었다. 자리에 앉는 브루스에게 접시 하나를 내민 제이슨은 그의 맞은편에 앉았다. 아쉽게도 메이플 시럽이나 잼 같은 것은 없어 있는 그대로 먹어야 했지만 그것도 나쁜 편은 아니었다. 제이슨이 먹기 좋게 적당한 크기로 핫케이크를 자르는 동안 브루스는 그저 제이슨이 하는 것을 바라볼 뿐이었다.
따끔따끔할 정도로 느껴지는 시선에 제이슨이 고개를 들어 브루스를 바라보았다. 한 마디 말도 없이 조용히, 시선만 교환할 뿐이다.
“어제는…… 고마웠다.”
제이슨은 무심코 그의 얼굴이나 형편없이 구겨진 티셔츠가 차마 가리지 못한 피부의 상처들을 바라보았다. 그의 몸에 원래부터 흉터가 많은 것은 알고 있었지만, 어째 그 수가 자신이 곁에 있었을 때보다 훨씬 더 많아 진 것 같은 기분은 비단 착각이 아니었다. 다른 상처들은 그리 깊은 상처들은 아닌 모양이었는지 살짝 피가 베어나온다거나 하는 것들이 다였지만 허벅지를 관통한 총상은 꽤 심각한 것이었다.
“당신이 내 말을 들을지는 의문이지만, 어쨌든 당분간은 걸어 다니지 않는 게 좋아. 알프레드에게 데리러 오라고 하던가.”
“아니.”
“…….”
“신세 좀 지도록 하지.”
아주 찰나의 순간이지만, 제이슨은 고민한다. 고민할 수밖에 없는 문제다. 여러 가지 복잡한 감정이 한데 뒤섞여 엉킨다. 속으로 혀를 찬 제이슨은 대답 없이 조각낸 핫케이크를 입 안으로 밀어 넣었다. 그제야 브루스도 나이프를 들었다.
* * *
우연이다.
우연히 그 날은 레드후드로 딱히 바깥을 나돌아 다닐 일이 없었고, 그저 우연히 그 길을 지났을 뿐이다. 하늘에서 뚝 떨어진 박쥐를 보지 않았더라면 제이슨 토드의 인생 중 가장 조용하고 지루한 날이 됐을지도 모르는, 그런. 핏기 없이 창백한 얼굴이 꼭 마치 그가 곧 죽을 것 같다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딱히 겁이 났던 것은 아니다. 어차피 한낱 인간의 목숨은 그 길로 가면 가는 거고 말면 마는 거다.
그러나 적어도 배트맨이, 브루스 웨인이 그렇게 아무도 없는 곳에서 쓸쓸히 죽어가는 것은 별로 성에 차지 않는 일이었다. 그래, 자신과는 달리. 안타깝게도 제이슨은 여전히 브루스를 사랑한다. 동시에 미워한다. 아니, 사실은 모두 다 헛소리다. 다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제이슨은 절대로 브루스를 지울 수 없다는 사실이었다.
“어디 봐.”
브루스는 순순히 제이슨에게 자신의 상처를 내보였다. 어제 생긴 상처들은 모두 제이슨이 발 빠르게 치료해준 덕분에 최악의 사태는 막을 수 있었다. 상처를 돌보는 것이 익숙해졌다는 것은 결코 좋은 일이 아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지금 이 상황에서는 그가 상처를 볼 줄 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게 느껴질 뿐이다.
“밖으로 나갈 건가?”
“글쎄.”
그 질문의 의미를 모르는 것은 아니다. 그렇기에 더욱 모호한 대답을 내놓는다. 브루스도 굳이 덧붙이지는 않았으나, 탐탁지 않아 하는 것쯤은 쉽게 알 수 있었다. 차라리 배트맨과 레드후드로 만났다면 오히려 더 속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숨이 막힐 것 같은 적막에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어차피 브루스는 저 다리로는 함부로 바깥에 나가지는 못할 것이고, 나간다면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제이슨은 옷에 달린 후드를 뒤집어썼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후드의 색은 빨간색이 아닌 검은색이었다.
* * *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는 역시나, 브루스는 없었다.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질러져있던 것을 하나씩 치워나가며 그 짧은 시간동안 짙게 남아버린 그의 흔적을 지워나간다. 예전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집을 깨끗이 치워주는 사람이 있었지만 지금은 아니었기에, 스스로 치우는 법을 배워야만 했다. 나름 치운다고 치우지만 종래에는 조금 덜 어질러져있을 뿐이지 깨끗해지지는 못해 한숨을 내쉰 적도 있다. 지금도 딱 그런 기분이 아닐까.
지우고 싶지만 지우지 못하는. 결국 마지막에는, 다시.
“…이런, 일찍 왔구나.”
되새기고 마는.
용케 목발은 어디서 찾은 건지 한 쪽 팔로는 목발을 짚고서 다른 팔로는 익숙한 상표가 찍혀있는 종이봉투를 든 브루스를 보며 제이슨은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배고파?”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여 보이는 그의 품 안에 든 것은, 과연 알프레드가 보면 질색할 만한 것들이었다. 강하게 식욕을 당기는 기름진 냄새가 코끝을 찌른다. 어느새 긴장도 맥없이 풀리고 만다.
“그런 건 배달로도 시킬 수 있거든.”
제이슨은 브루스의 품 안에 있던 햄버거 봉지를 건네받았다.
배리 앨런의 인생에는 두 명의 해리슨 웰스가 있다고도 말할 수 있었는데, 첫 번째 ‘해리슨 웰스’는 ‘해리슨 웰스’가 아닌 ‘에오바드 손’이라는 리버스 플래시가 해리슨 웰스의 가죽을 뒤집어 쓴 경우였고, 두 번째 ‘해리슨 웰스’는 지구 2의 해리슨 웰스이다. 한 사람의 인생에 두 명의, 같지만 다른 사람이 존재한다는 것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었다.
한참이 지난 후에야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어떠한 일이 있다 한들 그는 자신의 인생에 너무나도 깊이 들어와 있었고, 이제는 떼려야 뗄 수조차 없다는 사실을.
“……으음.”
“깼나? 웬일로 답지 않게 늦잠을 자는군.”
찌뿌듯한 몸을 일으켜 세우며 무겁기 짝이 없는 눈을 손등으로 비빈 후에도 배리는 온전히 제정신을 되찾을 수 없었다. 나른하고, 어딘지 모르게 붕 뜬 것 같은 감각이 온 몸을 집어삼킨다. 그 와중에 자신을 부른 목소리가 너무나도 익숙한 탓에 배리는 그의 이름을 불렀다.
“해리……?”
“표정이 어디 안 좋아 보이는데 괜찮나? 어제 메타 휴먼을 상대하느라 너무 피곤했던 건 아니고?”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그냥…….”
낯설다. 평소 자신이 기억하고 있는 해리는 이렇게까지 자상함을 보이는 사람은 아니었다. 줌에게 딸이 인질로 잡혀서 어느 곳에도 발을 붙이지 못해 조금은 신경질적으로 변해있는 그는 한없이 차가웠고 냉정했다. 그러나 그게 한편으로는 에오바드 손과 해리슨 웰스를 구분 지을 수 있게 해주는 것이기도 했다.
이런 저런 생각을 하던 찰나 부드럽게 이마에 내려앉는 손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따뜻했다. 놀랍고 당황할 틈도 없이 그가 물었다.
“열은 없는 것 같은데.”
“음, 어, 그게……, 잠깐만요. 제가 지금 뭔가 상태가 안 좋은 것 같기는 한데…… 여기가 지구2, 아니지, 지구3라거나 뭐 그런 제가 살고 있던 지구랑은 또 다른 지구인건가요?”
“배리?”
“잠깐, 잠깐만요. 해리는 나를 배리라고 부르지 않아요. 앨런이라고 부르죠. 그리고 이렇게까지 나한테 다정하게 굴지 않는…….”
“쉿, 배리. 진정해.”
“그렇지만……!”
부드럽게 입술이 맞닿고, 한참이 지나고 나서야 배리는 문자 그대로 뒤로 넘어갔다.
* * *
“지구1의 2025년, 크리스마스…….”
그래, 오늘은 크리스마스다. 한 가지 다른 점이 있다면 2025년이라는 거겠지만. 모종의 계기로 - 시간 여행을 위해 달린 적도 없고, 시스코에게 바이브를 부탁한 적도 없지만 어쨌든 - 인해 미래에 와 있는 지금, 이 모든 걸 제쳐두고 배리에게 가장 충격적인 사실은 오로지 단 하나 뿐이었다. 2025년의 배리 앨런의 연인은 해리슨 웰스라는 사실.
“해리는, 해리인거죠? 손이 아니라.”
“제시라는 딸이 있는 해리슨 웰스지.”
“아, 제시. …제시! 그럼 어떻게 되는 거예요? 내가 해리랑 연인이라면 제시가 내 딸이 되는 거예요?”
“아직 혼인신고는 안 했네만. 뭐, 그렇지. 그렇게 말할 수도 있지.”
“오, 세상에…….”
남의 속도 모르고 태평하게 커피나 홀짝이는 해리를 보며 배리는 속이 다 뒤집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방금 나눈 대화나, 한껏 너그러워진 해리를 보며 배리는 무심코 말했다.
“우리가, 줌에게 이긴 거군요.”
“네가 어떻게 미래에 왔는지는 모르겠지만, 배리. 이 이상은 알려고 하지 마. 뭘 바꾸려고도 하지 말고. 네가 뭘 물어보든 난 아무것도 대답해주지 않을 거야.”
“…….”
“너는 이미 두 개의 미래를 봤지. 손이 보여준 미래에서는 아이리스와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고 했던가? 미래는 언제든 바뀔 수 있어. 어떤 미래를 선택하든 그건 네 자유고 네 선택이야. 난 그걸 존중할거고.”
“내가 해리를 선택하지 않을 수도 있잖아요.”
“봐, 나를 선택하지 않을 거라고 말하지 않잖아?”
역시 해리슨 웰스는 말로는 이길 재간이 없다. 배리는 그대로 다시 침대위로 널브러졌다. 해리는 그런 배리를 보며 머리를 식히는 게 좋을 것 같다며 친절하게도 자리를 비워주었다. 배리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지금도 여전히 아이리스와 함께할 수 있는 미래가 눈앞에 펼쳐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배리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 없었다. 왜 거기서 바로 당연히 아이리스를 선택할 거라고 하지 않았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거야, 배리 앨런? 배리는 침대 옆 자그마한 탁상 옆에 놓인 해리와 단 둘이 찍은 자신의 사진을 보며 물었다.
* * *
“배리, 일어나.”
“……아, 해리.”
벌써 해가 저물어가는 바깥 풍경에 배리는 앓는 소리를 냈다. 결국 이렇게 허무하게 크리스마스가 가는 구나. 이제 그만 방에서 나오라는 말에 순순히 해리와 함께 거실로 나가자 억소리가 나올 정도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크리스마스트리를 보며 배리는 큰 웃음을 터트렸다.
“이건 진짜 대단한데요.”
“네가 크리스마스를 유독 좋아하니까.”
해리는 트리 바로 아래에 있던 빨간 상자에서 노란 별 모양 장식을 꺼내어 배리의 손에 쥐어주었다.
“항상 트리의 별을 장식하는 것도 네 일이었지.”
유독 자신이 크리스마스를 좋아하는 이유에는 그렇게 특별한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그저 사랑하는, 소중한 사람들이 한 곳에 모여 다 같이 웃고 즐길 수 있는 그 시간 자체가 좋았기 때문이었다.
“나는 당신이 나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줄 알았어요.”
“그 땐 나도 정신이 없었다는 건 인정하지. 자네도 알겠지만 난 그리 좋은 성격은 아니기도 하고. 알다시피 제시 일도 있었고, 나는 지구2의 사람이고 자네는 지구1의 사람이니 벽을 둘 수밖에 없었거든.”
“그 벽을 어떻게 없앴는지도 물어보면 안 되는 건가요?”
“배리.”
“모르겠어요. 정말 많이 생각해봤는데요. 왜 아까 내가 그렇게 애매한 대답을 한 건지, 지금도 이렇게 망설이는지 그 이유를요. 하지만 그거 하나만은 확실해요. 있잖아요, 해리. 난 당신을 싫어하지 않아요. 당신을 용서했으니까요. 물론 내가 용서한 건 해리슨 웰스가 아니라 에오바드 손이지만 어쨌든.”
늘 속으로는 바래왔던 일일지도 모른다. 그가 사실은 자신의 어머니를 죽인 사람이었을지언정 자신은 그를 동경하고 존경했다. 이미 훌륭한 아버지가 둘이나 있었지만, 그들과는 또 다르게 자신을 품어주는 멘토이자 아버지가 한 명 더 있는 것같이. 그랬기에 그랬던 만큼 더 배신당했다는 기분이었고 그랬기에 상처받았다. 그를, 그를 좋아했던 만큼.
다른 사람이라는 건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냥, 그저…….”
“나와 멀어지고 싶지 않은 거잖아.”
“……네, 맞아요. 이미 나한테 해리는 그만큼 소중한 사람이니까요. 은근히 벽을 만드는 것도 싫고, 쌀쌀맞게 대하는 것도 싫고.”
“배리 앨런.”
어느새 배리가 들고 있던 별 모양 장식을 가져가며 시선을 맞춘 해리는 지금까지 배리가 보아왔던 그 어떤 얼굴보다 자상하게 미소 지으며 말했다.
“이번 크리스마스의 별은 나보고 달아달라고 하게나.”
“…네?”
“나의 배리는 그렇게 했으니까.”
해리는 트리 옆에 있던 사다리를 펴 그 위를 밟고 올라가 꼭대기에 별 장식을 달았다. 달칵, 하는 소리가 나며 꼭 맞는 위치에 별이 놓이자 순식간에 모든 장식에 불이 들어오며 초록빛깔 트리에 형형색색의 꽃을 피웠다.
“배리.”
“네?”
“이거 하나만은 말해주마. 나는 그 때도, 그 어느 때도 말이다. …너를 싫어한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온화한 그의 미소에, 절로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메리 크리스마스.”
* * *
“배리? 어디 가요?”
“미안해요, 패티. 스타랩에 가봐야 하는 일이 생겨서.”
“누가 트리위에 있던 별 못 봤어요?”
“…배리?”
그 어떤 것보다 빨리 달릴 수 있다는 사실은 행운이다. 덕분에 2016년의 크리스마스가 다 지나기 전에 도착할 수 있었으니까. 서둘러 연구소 안으로 들어간 배리는 아직도 알 수 없는 수식들을 늘어놓으며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해리를 보며 소리쳤다.
“해리, 트리에 별 좀 달아주면 안 될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