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들 첫사랑이 성공할 가능성은 희박하다고 한다. 이 명제에 대해 술루도 얼추 비슷한 생각을 가지고 있다. 히카루 술루의 첫사랑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안타깝게도 자신의 첫사랑은 저 명제가 참에 더 가까워질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해주었다.

 


 

히카루 술루의 인생을 한 마디로 요약하자면 재미없음’, 정도로 요약이 가능하지 않을까. 그 정도로 술루의 인생은 보통의, 평범한 인생이었다고 해도 무방했다. 중학교에 들어서면서부터 성적은 꾸준히 상위권이었고 그의 친구들은 모두 그를 모범생이라는 단어를 쓰며 표현했다. 술루가 인생에서 딱 한 번 일탈과 비슷한 짓을 해본 것은 고등학교 때 잠깐 배웠던 펜싱이 전부였는데, 그는 고등학생 대표를 꿰찰 정도로 아주 우수한 재능을 보였으나 펜싱 선수가 되지는 않았다.

평범하고 재미없는 인생. 대체 그런 인생을 살면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동급생들의 말에도 술루는 아무런 대꾸조차 하지 않았다. 사실 술루는 그들의 말에 동의하는 편이었으니까. 자신의 인생은 퍽 재미없고 단조롭고 지루하다. 허나 딱히 그것을 바꾸려는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뿐이다.

그런 목석같은 남자의 인생을 단박에 뒤집어 놓은 것, 그것이 바로 첫사랑이었다. 술루는 그것이 사랑이라는 감정임에 의심조차 하지 않았다. 자신이 느끼는 그 감정은 사랑이 맞았고, 사랑이어야만 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신의 인생이 이렇게 재미없고 지루한 것에 대해 미련하다 싶을 정도로 한심하게 여기지 않았을 테니까.


바람이 불었다. 겨울에 부는 바람은 시리도록 차가웠지만, 이상하게도 따뜻했다. 태양은 이미 구름 너머로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지만 나는 너무나도 눈이 부셨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빛은 내 눈을 멀게 했다. 아아, 이 감정에 어떤 이름을 붙여야 할까.”


나른한 오후, 점심시간이 지난 이후의 문학 수업은 어떤 이들에게는 아주 치명적인 수업이다. 히터가 돌아가는 소리, 누군가가 볼펜을 똑딱이는 소리. 그 모든 소리를 뚫고 내려앉는 교수의 목소리는 마치 이 세상에서 단 한 번도 들어보지 못한 음()을 품고 있는 것 같았다.


아아, 사랑이구나.”


술루는 우습게도, 너무나도 쉽게 사랑에 빠졌다. 그래, 그의 재미없는 인생만큼이나 재미없게.


 

 

안타깝다고 해야 할지, 자신이 다른 누군가를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고 해서 이십년이 넘도록 살아온 인생이 단 하루아침에 해가 서쪽에서 뜰 정도로 변하지는 않았다. 그저 조금씩, 아주 조금씩 내면에서부터 잔잔히 텅 비어있던 곳에 무언가를 차곡차곡 채울 뿐이었다. 따스한 햇살이 녹아드는 포근한 그의 개인 집무실에서, 그의 눈만큼이나 온화한 헤이즐넛색 가죽 소파에 반쯤 기대어 누운 술루는 그 고요한 시간을 누구보다 즐기고 있었다.

한손에 들고 있는 책의 무게는 변함이 없었지만 왼쪽의 무게가 오른쪽보다 무거워지기 시작하자 술루는 고개를 살짝 내밀어 그의 책상을 살펴보았다. 그러자마자 귀신같이 고개를 드는 그와 눈이 마주친 술루는 그대로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다 읽었어?”

……아니요.”

그걸 다 읽어야 과제를 봐주던지 할 거 아니야.”

이 책 보기보다 어렵거든요.”

그 책을 30분 만에 100p가 넘게 읽은 학생은 너 밖에 없거든.”


술루는 그대로 책으로 얼굴을 덮었다. 피곤한 눈을 살며시 감고 사각거리는 펜이 그어지는 소리를 자장가삼아 숨을 고른 술루는 그대로 서서히 잠에 빠져들었다.


이봐.”

…….”

, . 자냐?”


그러나 그는 술루를 깨우지 않았다. 당연하다는 듯이, 술루를 자신의 집무실 소파 위에서 자게 내버려두었다. 비록 잠에서 깨어난 술루가 왜 자게 내버려두었냐는 어처구니없는 소리를 할게 분명했지만 말이다.

 

 

술루는 자신의 인생의 두 번째 일탈을 결심했다. 언젠가 그의 책상에서 보았던 담배와 똑같은 담배를 사들고는 옥상으로 향했다. 이미 누군가 한 차례 담배를 피우고 간 모양인지 재떨이를 겸하고 있는 깡통에는 타다만 담배꽁초가 남아있었다. 어디서 본 건 있어서 나름 익숙한 폼으로 담배를 쥔 술루는 담배 끝에 불을 붙이고는 적당히 한 번, 깊게 들이마시고는 후, 하고 연기와 숨을 한 번에 내뱉었다. 옅은 회색빛 연기가 너울너울 춤을 추며 흩어지는 동안, 술루는 생각했다. 대체 이 맛없는 건 왜 하는 거야? 쓰기만 하네.

그러나 우습게도 술루는 그 뒤로 담배를 끊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처음 맛보는 담배의 맛은 더욱 씁쓸했지만 중간에 사례가 들린다거나 하는 지극히 초보자적인 실수 한 번조차 하지 않은 채 술루는 그 날 담배 두 개비를 피웠다.


너 담배피우냐?”

으음, 아니요.”

이게 어디서 눈에 빤히 보이는 거짓말을 하고 있어. 냄새 나잖아.”

심해요?”


술루는 손바닥을 활짝 펴 킁킁, 하고 냄새를 맡아보았지만 역시 자신의 냄새는 맡을 수 없었다. 그 때 툭, 하고 날아온 작은 스프레이 병에 술루는 아무 말 없이 그것을 자신의 온 몸에 뿌렸다. 흔한 섬유유연제향이 온 몸을 뒤덮어가는 것을 느끼며 술루는 그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있잖아요, 이거 교수님이랑 같은 향인 거죠?’

 


 

그는 아마 다 알고 있을 것이다. 알고 있음에도 모른 척을 하는 것일까, 아니면 자신을 배려해주고 있는 것일까. 왜 그 날 난생 처음 폈던 담배가 지독히도 씁쓸했지만 한 번도 잘못 토해내지 않았을까.


맥코이 교수님. 저 교수님 좋아해요. 아니…….”


아시죠? 사실 그거보다 더 한 거. 차마 그 말은 덧붙일 수 없었다.


 

 

맥코이는 그 때 자신이 내렸던 결정에 대하여 후회하지 않았다. 아니, 후회하지 않아야만 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술루와의 관계는 그가 대학에 있던 딱 4년이 전부였다. 맥코이는 그저 스타플릿 대학의 영문학 교수일 뿐이었고 술루는 영문학을 전공하고 있는 학생일 뿐이었다. 사실 그 뿐이어야만 했다. 어느 날부터 자신의 과제나 논문을 봐주었으면 좋겠다는 이유로 집무실에 찾아오기 시작한 발걸음을 애초에 돌려보냈어야 했다. 그러나 왜 그러지 못했는가.


, 이런.”


자기도 모르게 힘을 준 탓에 얇은 펜촉이 툭 하고 부러져 주저앉았다. 덕분에 잉크가 새어나오며 까만 점을 만들었다. 맥코이는 그대로 책을 접었다. 반대편에 차마 마르지 않은 잉크가 묻을 테지만 상관없었다. 콧대를 누르고 있던 안경을 벗어내고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를 느슨하게 풀었다.

레너드 맥코이는 이성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이었다. 사실, 이것은 변명일 뿐이다. 이미 한 차례 실패를 겪어본 사람의 구차한 변명. 딱히 인생이 절망적이라거나 모멸감을 느낄 정도로 좌절하지는 않았다. 그런 어중간함이 결국 술루에게는 상처만 준 것 같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었다.

그 아이가 읽고 있는 책이 자신이 추천해준 책 중에서도 가장 어려운 책이라던가, 담배라고는 필거라는 생각조차 들지 않는 순진해 보이는 아이가 처음으로 피워본 담배의 향이 자신의 것과 똑같다던가, 하는 너무나도 눈에 뻔히 보이는 사실을 알면서도 침묵을 택했다. 어느 가을 날, 조금은 쌀쌀해진 날씨에 창문을 닫고 커튼을 치는 사이에 맞닿은 입술에도, 맥코이는 침묵을 택했다.


좋아한다고 한 마디만 해주세요.”

…….”

아시잖아요, 전 교수님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는 거.”

…….”

……제발.”


머리 위에, 뺨에 닿는 차가운 눈송이에 신경을 쓸 겨를도 없이 바닥으로 뚝뚝 떨구어지는 굵은 눈방울에도. 조금은 충동적이었을지도 모르는 그 날의 입맞춤에 대해서도 묻지 않고서, 술루는 자신의 옷소매로 눈물을 닦아내고는 발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웃으며 말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맥코이 교수님.

맥코이는 담배를 끊었다. 벌써 네 번째 겨울이 가고 다섯 번째 봄이 돌아오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자네, 맥코이 교수 제자였다지?”

.”

잘됐구먼. 그 양반 집무실은 쓸데없이 넓으니까 자네 집무실이 마련될 동안에만 거기서 같이 일을 보게나. 맥코이 교수, 안에 있나?”

, 들어오세요.”


맥코이는 부랴부랴 두드리고 있던 노트북의 뚜껑을 닫고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허겁지겁 일어나는 바람에 반쯤 차있는 커피 잔을 엎을 뻔한 맥코이는 학과장과 함께 들어온 남자를 보고서는 기어코 연필꽂이를 쏟아버리고 말았다.


아이고, 이 사람 정신없는 것 좀 보게. 못 볼 거라도 봤나? 하긴, 몇 년 전에 가르쳤던 제자가 교수가 되어 떡하니 다시 눈앞에 나타났으니 좀 놀랐나?”

……교수?”

자네랑 같은 영문학과 교수 한 명 충원됐다고 공고를 내린지가 언젠데 사람이 그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쯧쯧, 아무튼 인사하게. 굳이 통성명을 할 필요까지는 없어 보이지만 예의라는 게 있으니. 어허, 설마하니 자네 이 친구를 기억하지 못한다고는 하지 않겠지?”


느닷없이 들이닥친 다섯 번째 봄. 차마 네 번째 겨울이 채 지나지도 않았는데 불쑥 고개를 내밀어버린 봄에 당황할 겨를도 없이.


안녕하세요, 맥코이 교수님.”

……오랜만이네, 술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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